26/09/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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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이후 우리에게 남는 것은
수많은 토종벼 품종 가운데 가장 먼저 쓰러져 처연하게 논 안에 누운 녀석이 있습니다. 2023년 양평 채종포에서 종자용 50알을 국립유전자원센터로부터 받아 심어 증식된 낟알을 살펴 보던 중, 동명이종이 발견되어 눈여겨 보았던 “옥경조”라는 품종입니다. 10여년 전부터 이어져 주력 품종으로 선정하여 재배해 왔던 “옥경(玉京 옥황상제가 산다는가상적인 서울이라 나믐 해석하고 있다.)“과 이름이 동일합니다.
허나 벼의 속살을 들여다보는 순간, 서로 너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옥경”은 키가 작고, 현미색은 일반적인 멥쌀의 미색을 띄며 안정적인 수량을 내어주는 반면, “옥경조”는 키가 제법 크고, 현미색은 붉은색이며, 수량은 월등히 많아 보였습니다.
토종벼를 재배하면서 늘상!! 꼼꼼히 한 품종씩 관찰하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이러저러하게 바쁘다는 핑계로 관성적으로 종자를 심을 때가 많습니다. 다행히 올해 초에는 풍동농부님이 결합하면서 그나마 새로운 품종을 조금 들여다 보게 되었는데, ”옥경조“의 경우 우선 현미색이 붉으면서 낟알도 자광도나 여타 다른 유색미(적미)에 비해 큼직막한게 2026년 주력 품종으로 삼자고 풍동농부님이 제안을 했습니다.
우리가 2-3년 차 품종을 주력으로 삼는 다는 것은 기존 확보한 종자를 샘플 볏단만 남기고 나머지 벼를 모두 종자용으로 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종자를 재배했다면, 종자은행에서 1차로 50알로 시작되어 2년차 때는 대략 50,000알이 되며, 3년 차가 되면 50,000,000알이 되는 것이죠. 순식간에 어마어마한 양으로, 그야말로 기아급수적으로 불어나 3년 차부터는 원하는 양만큼 심어 볼 수 있게 됩니다.
“옥경조”를 그렇게하여 일반 산파용(흩어뿌림용) 모판으로 3판을 만들어, 채종포가 아닌 별도의 논(당골논)에 심게 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채종포용은 한 품종 당 반판씩밖에 만들지 않는 것에 비해 옥경조는 꽤 많은 양의 모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직 우리는 맛이나 재배 시 특이점을 확인하지 못한 터라 심어봐야 이 품종을 향후 진짜 주력으로 삼을 수 있는지를 확인해 볼수 있습니다.
헌데 잔뜩 기대했던 것과 다르게 볏대가 연약해서인지 큰 바람이나 태풍도 없었는데 쓰러져버렸습니다. 벼가 쓰러지게 되면 가장 먼저 조치를 취하는 게 논물을 빼는 것입니다. 아직 수확기도 한참 남았는데 쓰러진 벼를 물속에 내버려두면 싹이 트거나, 썩어버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물을 빼게 되면 한 논에 있는 다른 많은 품종들이 물맛을 덜 보게 되어 야무지게 익지 못하는 피해를 보게 되겠지요. 우리는 살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해야만 할 때가 옵니다.
현재 병상에서 휠체어 없이는 거동이 어려운 내 처지로는 쓰러진 벼에 대한 대책이 머리속에서만 멤돌 뿐, 어떤 조치도 취하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그 마음과 풍동농부님과의 인연이 떠오르신 건지, 여주 우보농장의 채종포 종자 수확과 탈곡을 담당해주시는 홍여사님께서 “옥경조”를 가장 먼저 수확해주셨습니다. 그것도 물을 빼지 않은 상태로 가장 난이도가 높은 물속에서 낫질을 하였던 겁니다. 풍동농부님을 떠나보낸 지 15일 만에 “옥경조”를 수확해 놓으며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생명이 태어나 일생을 살다보면 무수히 많은 인연과 흔적을 남기게 될 터이지요. 그것이 악연이 될 수도, 선연이 될 수도 있겠고, 깊고 넓은 흔적이 될 수도, 얕고 좁은 흔적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다고 반드시 이런 인연과 흔적을 남기겠다고 작정한다고 그리되는 것은 또 아닐 겁니다. 모든 것은 자연스레 이어지고, 연결되고, 흩어지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옥경조”는 풍동농부님 덕에 오랜 시간 우리에게 그 흔적이 뚜렷이 새겨질 것만 같습니다.
볕이 좋은 날, 얼른 시간을 내어 옥경조를 잘 말려서 털고, 까불려 도정하여 따끈한 밥 한그릇! 풍동 형님에게 올려야 할 거 같네요.